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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대교

루스티 2010. 8. 3. 12:53
한강의 다리
한강대교(漢江大橋)
상류 동작대교<-한강대교->한강철교 하류개통 : 1917년 10월
구조형식1차 교량(일제)핀 프랫 트러스교(Pin Connected Pratt Truss Bridge)
2차 교량(일제)리벳팅 타이드 아치교 (Riveting Tied Arch Bridge)
강판형게르버교(Steel Plate Girder Gerber Bridge)
확장 교량용접접합 타이드 아치교 (Welding Tied Arch Bridge)
강판형게르버교(Steel Plate Girder Gerber Bridge)
중지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3가와 동작구 본동(노량진) 사이를 잇는 총연장 1,005m의 한강 위에 놓인 최초의 인도교이다. 일제치하의 조선총독부가 제1기 치도사업의 일환으로 1916년 3월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917년 10월에 준공하였으며 1925년 소교가 유실되어 복구 후 1935년 확장된 신교가 건설되었다. 1950년 6월 28일 6.25 전쟁으로 인해 폭파되었으며, 9•28수복 후 우선 1차선만 복구하여 차량 통행을 재개하였고, 1954년에 완전 복구되었다. 1979년 1월에는 4차선 교량을 8차선 교량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1981년 12월에 완공하였다. 1984년에는 한강종합개발사업에 따라 제1한강교 에서 한강대교로 개칭되었다.

한강대교는 서울에서 남쪽방면의 노량진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관문위치라 할 수 있다. 서울의 관문인 한강대교는 1916년 3월에 가교가 착수되었으며 이당시 총공사비는 843,000원이 소요되었다. 노량진 쪽에는 경간 60m인 7연의 한강대교와 용산측에 경간 60m인 3경간의 한강소교를 설치하고 양쪽다리 중간은 401m의 둑을 쌓아 연결하여 1917년 10월에 준공하였다.

1900년 7월 한강에 철도교가 가설되었는데, 대한제국 정부가 미국인 J.모스(Morse)에게 경인선 철도의 부설권을 부여할 당시에는 한강철교에 ‘보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길 한쪽 또는 양쪽에 보도를 시설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으나 모스로부터 철도부설권을 가로챈 일본은 공사비를 절감한다는 이유로 보도 가설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민간용의 차량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도보로 한강을 건너는 이들은 배를 이용하여 한강을 건넜기 때문에, 보도 교량을 건설할 만한 수요가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자동차가 수입되기 시작하고 강을 건너려는 수요가 증가하면서 조선총독부가 인도교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1917년 최초로 가설된 인도교는 중지도∼노량진 간의 7경간 440m의 대교와 중지도∼한강로간의 3경간 188m의 소교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차도는 4.5m, 좌우 보도는 각각 1.6m였다. 이러한 철교 및 인도교의 개통으로 영등포와 노량진 일대가 급격히 도시화되었다.

이 교량은 한강철교의 낡은 자재를 이용하여 가설하였으므로 폭이 좁고 중앙차도 4m, 좌우측 보도는 각 1m에 불과하였다. 교통량의 증가로 인해 교량 가설 10년 후에는 협소한 인도교 하나로 그 교통량을 처리하기가 힘들게 되었으며 그후 1925년 7월에 있었던 을축년 대홍수때 중간둑이 유실되어 소교 부분이 완전 유실되는 등 손상을 입었으므로 유실된 소교를 길이 459m, 너비 18m로 확장하여 재건하고 전차궤도도 부설하는 공사를 1927년 5월에 시작하여 1929년 9월에 준공하고 18일에 도교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소교에 비해 대교 부분의 폭이 협소하여 차량 소통 등에 불편이 누적되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1934년 8월 신교 건설에 착수하여 2년 후인 1935년 10월에 현재의 규모와 거의 같은 교량을 준공하였다. 같은 기간에 2번째의 인도교인 광진교도 건설되었다. 그로부터 이 한강교는 서울과 강남을 연결하는 유이한 통로로서 서울의 간선도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난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대교 구간의 2, 3, 5번째 경간이 국군에 의해 폭파되어 사용불능상태가 되었으며, 한강교량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던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폭사 및 익사하였으며 50여대의 차량도 함께 파괴되었다. 그 후 타이드아치 3경간이 파괴되었던 것을 9.28수복 후 우선 1차선만 복구하여 차량 통행을 재개하였고 1957년 1월에 복구공사를 착수하여 1958년 5월 15일에 준공하였다.

서울의 인구와 교통량이 크게 증가됨으로 인하여 1979년 1월에는 4차선 교량을 8차선 교량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1981년 12월에 준공하였는데, 기존 교량과 같은 규모의 설계에 의하여 중지도∼한강로의 소교 구간은 기존교량의 동쪽을, 중지도∼노량진의 대교 구간은 기존 교량의 서쪽을 확장하였다. 종전의 폭을 20m에서 40m로 확장하여 쌍둥이 교량으로 탈바꿈하였으며 그 이름도 예전의 한강인도교에서 한강대교로 개칭하였다.

6.25 전쟁과 한강대교 폭파

6.25 전쟁이 일어난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30분, 한강 인도교와 철교에 하늘을 훤하게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고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하였다. 대교 구간의 2, 3, 5번째 경간이 폭파되어 사용불능상태가 되었으며, 위정자들이 서울을 버리고 야반도주했다는 소문에 의해 한강교량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던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폭사 및 익사하였으며 50여대의 차량도 함께 파괴되었다.

다리가 폭파되던 당시에 북한군 주력은 아직 서울 외곽에 있었고 오로지 2대의 북한군 전차만이 당시 서울의 북쪽 경계인 미아리를 넘고 있었을 뿐이었으며, 비록 제7사단처럼 초전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부대들이 많아 서울의 함락이 예견될 정도로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반면 경의선축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던 제1사단처럼 서울 방어를 위해 투입된 많은 아군부대들이 한강 북쪽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는데, 동부전선의 제6, 8사단과 옹진반도에서 퇴각한 독립 제17연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부대들이 이곳에 투입되어 있던 상황에서 한강다리들을 폭파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 지도부 스스로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없음을 증명하였고, 이 때문에 한강이북에 있던 부대들의 전투 의지 또한 급속히 사라져 버렸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아군은 모든 중장비를 유기한 체 단위부대 별로 흩어져 한강을 건너게 되는데 바로 이때 전쟁 초기 아군의 전력이 가장 많이 감소되었다.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지원 나온 미 군사고문단의 처치(John H. Church) 준장은 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서울에서 적극 시가전을 펼칠 것을 권고하였지만 육군본부는 다리를 성급히 폭파함으로써 서울을 사수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증명하였다. 반면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 탈환 작전 당시에 전력이 열세였던 북한군은 서울을 요새화하여 무려 열흘 가까이나 방어해 낸 것을 볼 때 서울은 적에게 점령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내어준 것과 다름없었다고 볼 수 있다.

다리 폭파직전에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전개한 부대는 서울을 방어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야반도주한 위정자들을 따라 함께 내려온 육군본부와 김포반도에 긴급 배치된 일부 부대들뿐이었으므로, 한강교량 폭파는 전후 사정을 가리지 않고 국군 주력을 한강 이북에 그대로 둔 상태로 무턱대고 벌인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정황상 어쩔 수 없었다' 는 견해보다 엄청나게 잘못된 것이었다 는 비판적인 주장이 아직도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폭파의 시기와 방법이 너무 문제가 많았고 더구나 효과가 미진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국방부 6.25 제60주년 사업단 블로그에서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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