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여행 - 7. 세계 표준시가 시작된 그리니치 천문대, 포트넘 앤 메이슨

오늘도 일찍 일어나 엘리자베스선을 타러 왔다. 작년 개통해서 다른 노선들과 달리 굉장히 깨끗한 편이었다.

런던 지하철에 스크린도어가 있는 것도 엘리자베스선이 유일하다.

카나리 워프역으로 왔다. 물 위에 떠있는 듯한 이 건물 안에 역이 있는데, 세계 각지의 진귀한 것을 싣고 들어오던 배를 본떠 설계한 건물이라고 한다.

DLR을 타러 왔다. 엘리자베스 라인의 카나리 워프역에서는 웨스트 인디아 퀘이역이 가까웠다.

DLR은 1987년에 개업한 경전철로, 처음부터 무인으로 운행되도록 설계되었다. 대신 승무원 한 명이 타서 출입문 취급과 검표업무를 수행한다.

커티삭역에 내려 5분 정도 걸어오니 그리니치 공원에 도착했다. 1433년부터 왕의 사슴 사냥터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런던의 왕립 공원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길. 아직 일곱시 전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잔디밭 너머로 흰 건물이 보인다. 1616년에 왕비의 별저로 짓기 시작한 퀸스 하우스로, 영국에서 처음으로 순수한 고전 양식으로 설계된 건물이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닫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초대 왕실 천문관이 살던 집과 팔각방, 시계 전시실과 본초자오선이 그려진 안뜰이 있다. 오픈은 10시.

오른쪽 벽에 걸린 24시간 시계는 셰퍼드 게이트 시계라고 하는데, 1852년에 달린 초기 전기 시계로 그리니치 표준시를 일반에 처음으로 보여 준 시계다. 문자반이 24등분이라 정오에 바늘이 위가 아니라 아래를 가리킨다. 그 아래 쇠판에 새겨진 눈금은 야드와 피트, 인치의 표준 길이다.

안쪽 본관의 모시계가 보내는 전기 신호를 받아 도는 자시계로 1852년부터 1893년까지 여기서 전신선을 타고 런던과 에든버러, 글래스고, 더블린, 벨파스트까지 시간을 전송했다고 한다.

그리니치 천문대. 1675년에 찰스 2세가 바다에서 경도를 알아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 설립한 곳이다.

바다 위에서 위도는 별을 보면 알 수 있었지만 경도는 그럴 방법이 없어 항해 중에 제 위치를 절반밖에 짚지 못했다. 그런데 출항할 때 맞춘 정확한 시계를 지니고 있으면, 배가 있는 곳에서 정오가 되었을 때의 시차로 경도를 잴 수 있다. 이렇게 위치를 구하는 방법은 해도에 실려 유럽 대륙으로 전파되었고 사실상 표준이 되어 이후 이곳을 본초자오선으로, 이곳의 시간을 세계 표준시로 정하게 되었다.

천문대 지붕 위의 붉은 공은 1833년부터 매일 오후 한시 정각에 떨어뜨려 템즈강의 배들이 이것을 보고 시계를 맞추게 한 신호구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개 시보 중 하나로 지금도 동작한다고 한다.

안뜰에는 이런 팻말이 있는데 자오선을 실제로 그은 망원경 이야기가 적혀 있다. 지금의 본초자오선은 1851년에 일곱 번째 왕실 천문관이 이 자리에 놓은 자오선 망원경이 향하던 방향으로, 아래쪽 바닥에 금속으로 표시된 선이 경도 0도를 표시하는 본초자오선이다.

안뜰에 뻗어있는 자오선의 모습. 다만 오늘날 GPS가 가리키는 경도 0도는 여기서 동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당시 기준으로 삼은 직선이 지역의 지형에 끌려 조금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붉은 벽돌로 두른 건물이 나온다. 1890년대에 새 물리 천문대로 지은 사우스 빌딩인데, 한동안 천문대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천문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천문대의 외벽. 벽 안쪽에 기울어진 원뿔대 모양의 건물은 2007년 문을 연 피터 해리슨 플라네타리움이다.

언덕 아래쪽의 정원. 박물관 뒤편의 망원경이 들어있는 돔이 보인다. 돔 안에는 1893년에 들여놓은 28인치 굴절 망원경이 들어 있는데 영국에서 가장 큰 굴절 망원경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굴절 망원경 가운데도 열 손가락 안에 든다. 돔이 탑보다 넓게 부풀어 있어 양파 돔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담장 아래 블루벨이 한창 피어 있다. 꽤 탐스럽게 피어 있어서 한 장 남겨 보았다.

천문대의 언덕에서 내려다본 풍경. 앞쪽에 구 왕립 해군학교와 퀸스 하우스가 있고, 강 건너에 카나리 워프가 위치해 있다. 카나리 워프는 원래 부두였는데, 컨테이너선의 시대가 되면서 부두는 옮겨가고 재개발을 진행해 금융가로 바뀌었다.

런던의 전통적인 금융가는 서쪽에 위치한 시티 오브 런던이었다. 1986년에 금융 규제를 한꺼번에 푼 이른바 빅뱅이 있고 나서 은행들이 트레이딩 룸과 전산 설비를 놓을 넓고 평평한 층이 필요해졌는데, 중세의 길과 보존 규제에 묶인 시티에서는 그런 건물을 짓기가 어려웠고, 비어 있던 카나리 워프를 재개발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다만 요즘은 시티 오브 런던도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은행들이 다시 시티 쪽으로 되돌아가는 추세라고 한다.

조깅하는 사람과 자전거타는 사람이 꽤 있었다.

언덕을 내려오면 국립해양박물관 앞에 커다란 병이 하나 놓여 있다.

잉카 쇼니바레의 「넬슨의 병 속 배」로, 넬슨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탔던 HMS 빅토리를 30분의 1로 줄여 병에 넣은 것이다. 원래는 트라팔가 광장에 2010년부터 2년간 전시되어 있다가 2012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 돛에 입힌 무늬가 눈에 띄는데, 네덜란드 상인들이 인도네시아 바틱을 본떠 대량으로 찍어 서아프리카에 팔던 천의 무늬라고 한다.

국립해양박물관 입구. 10시부터 문을 연다기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항해 기구와 해도, 선박 모형과 도면, 제복과 회화까지 250만 점 가까이 모아 둔 세계 최대급 해양 박물관이라고 한다. 가장 유명한 것은 넬슨이 트라팔가에서 총에 맞을 때 입고 있던 제복인데, 왼쪽 어깨에 총알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강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벽돌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아침에 지나온 공원과 천문대부터 이 옛 마을과 강가의 해군학교까지가 한 묶음으로 1997년에 「해양 도시 그리니치」라는 이름의 세계유산이 되었다.

커티삭. 1869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지은 차(tea) 운반용 쾌속 범선으로, 지금 남아 있는 유일한 티 클리퍼다. 2007년에 보수 중 불이 나는 바람에 공사가 18개월 더 걸렸는데, 다행히 돛대와 판재 상당수를 미리 떼어 보관해 둔 뒤여서 테세우스의 배가 되는 것은 면했다. 지금 배는 처음 진수했을 때의 선체가 90퍼센트쯤 그대로라고 한다.

걸어서 커티삭역으로. 이름부터 Cutty Sark for Maritime Greenwich라 그리니치역이 따로 있지만 배와 해양박물관은 이쪽이 가깝다.

이번엔 DLR의 카나리 워프역에 내려 보았다.

엘리자베스 라인 카나리 워프역으로 돌아간다.

그리니치를 갔던 길로 되돌아와 다시 피카딜리 서커스로 왔다. 이틀 전에 밖에서 보고 돌아갔던 포트넘 앤 메이슨을 구경하러 와 보았다.

이번에는 기념품을 사러 들어가 본다. 포트넘 앤 메이슨은 1707년에 왕실에서 시종으로 일하던 윌리엄 포트넘이 집주인 휴 메이슨과 손잡고 연 식료품점으로, 지금도 그때 그 자리인 피카딜리 181번지의 벽돌 건물을 쓰고 있다. 삼백 년 넘게 영국 왕실에 납품하는 가게라서 대관식 등의 행사가 있으면 기념 상품을 많이 파는 편이라고 한다.

입구 위의 시계는 1964년에 창업자 둘을 기려 단 것으로, 정각마다 두 사람의 인형이 나와 서로 인사한다.

2층에 THE CORONATION OF HM KING CHARLES III 라고 붙인 코너가 통째로 차려져 있었다. 대관식이 두 주 정도 남은 때라 매장에서 굉장히 돋보이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층의 굿즈 코너. 차도 팔고 있지만 그 외 기념품이 더 많았다. 저번에는 유럽을 길게 도는 일정이라 짐이 늘어날까 봐 구경만 하고 나왔는데, 이번에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니 좀 사 보았다.

초콜릿과 터키시 딜라이트를 파는 코너. 케이크같은 것은 가져갈 수 없으니 구경만 해 보았다.

사 온 것들. 찰스 3세 대관식 기념 본차이나 찻잔 세트와 티 타월, 그리고 생일선물용 비스킷 통까지 기념품으로 사 보았다. 비스킷이 든 틴 케이스는 돌리면 음악이 나오는 오르골 박스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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